폭증하는 택배 쓰레기 속 '재활용 불가' 종이테이프 봇물 계도기간 2년··· 단속 없는 사이 '가짜 친환경' 포장재 급증 전문가들 "재질 둔갑 멈추고 다회용 순환 물류 도입해야"
아이를 키우는 가정이라면 하루가 멀다 하고 문 앞에 쌓이는 기저귀와 장난감, 생필품 택배 박스에 익숙할 것이다./인공지능 생성 이미지
아이를 키우는 가정이라면 하루가 멀다 하고 문 앞에 쌓이는 기저귀와 장난감, 생필품 택배 박스에 익숙할 것이다. 최근 유통업계는 택배 박스에서 비닐 테이프와 플라스틱 완충재를 모두 걷어내고 종이 포장을 확대하며 친환경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소비자들은 종이테이프가 붙은 박스를 분리수거장에 내놓으며 환경을 지켰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폐지 재활용 공장의 현실은 소비자의 기대와 다르다. 착한 포장재로 홍보된 종이테이프가 재활용 설비를 막고 용수를 낭비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유통·물류 기업들이 도입한 종이테이프가 기존 비닐 테이프만큼의 접착력과 내구성을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합성수지(플라스틱)의 힘을 빌려야 한다.
무거운 택배 박스가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테이프 내부에 유리섬유나 플라스틱 실을 격자무늬로 덧대거나 물에 녹지 않는 강력한 화학 점착제를 두껍게 도포하는 방식이다. 겉보기에는 완벽한 종이 같지만 실제로는 플라스틱과 화학 점착제가 뒤섞인 복합 소재인 셈이다.
문제는 소비자 대부분이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종이테이프를 박스에 붙인 채로 분리수거함에 넣고 있다. 한국소비자원이 시중에 유통 중인 종이테이프 25개 제품을 분석한 결과 88%가 재활용 과정에서 이물질로 잔류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제품 포장지에는 친환경, 재활용 가능이라는 문구가 버젓이 적혀 있다. 환경부 지침상 테이프는 제거 후 일반쓰레기로 배출해야 하나 이를 알지 못해 공정 오염이 발생한다.
재활용 설비 멈추고 폐수까지··· 제지공장 덮친 ’끈끈이‘ 공포
골판지 박스를 재활용하려면 물에 풀어 펄프를 분리하는 펄프 분리 공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종이테이프에 묻어 있던 강력한 점착제들은 물에 녹지 않고 끈적끈적한 찌꺼기 형태로 뭉치게 된다.
소비자들은 종이테이프가 물에 스르르 녹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택배 상자가 터지지 않게 꽉 잡아주는 강력 점착제와 나일론 실은 절대 물에 녹지 않는다. 펄프를 풀어주는 펄프 분리 설비 안에서 이 점착제들이 껌딱지처럼 뭉쳐 미세한 거름망을 꽉 막아버린다.
제지업계 한 관계자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기계를 세우고 독한 화학약품으로 끈끈이를 긁어내야 한다”며 “이 점착제 찌꺼기들이 설비의 미세한 거름망을 막아버려 기계 가동을 수시로 멈춰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점착제 찌꺼기를 씻어내기 위해 막대한 양의 화학약품과 세척수가 추가로 투입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수와 탄소 배출량은 오히려 기존 비닐 테이프를 사용할 때보다 환경 부담이 클 수 있다. 개선된 리펄프 테이프 도입으로 일부 완화되고 있으나 여전한 역설이다.
칭찬은 유통사가, 쓰레기 독박은 제지사가
더 큰 문제는 유통업체들이 종이 포장재를 면죄부 삼아 배송의 절대적인 부피와 쓰레기양을 줄이려는 노력을 외면하고 있다. 하나의 작은 화장품을 보호하겠다며 두꺼운 종이 완충재를 칭칭 감고 커다란 박스에 종이테이프를 과도하게 발라 배송하는 식이다.
포장재 재질만 바꾸면 친환경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정작 포장 자체를 줄이는 데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비닐을 없앴다는 홍보 효과는 유통사가 독차지하지만 처리 비용과 설비 부담은 재활용 공정 최후방의 제지사에 고스란히 전가된다.
업계 한 전문가는 “비닐을 없앴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기업들이 정작 재활용의 최종 단계인 제지공장으로 쓰레기 처리의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며 “본질은 포장재의 재질을 종이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포장의 절대량을 줄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국내 택배 1건당 포장재 사용량은 매년 늘고 있어서 재질 전환만으로는 포장 쓰레기 증가를 막기 어렵다”며 “환경부가 2024년 3월부터 2년간의 계도기간을 거쳐 2026년 4월 과대포장 단속에 나설 예정이지만 현장 단속과 제도 보완은 여전히 미흡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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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재 재질 교체는 미봉책··· “다회용 순환 물류만이 근본 해법”
일각에서는 포장재의 재질을 바꾸는 수준을 넘어 포장 자체의 절대량을 줄이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업계 한 관계자는 “초기 비용이 들더라도 다회용 수송 포장재의 순환 물류 시스템을 전면 도입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라며 “소비자가 종이테이프를 박스에서 완전히 제거한 뒤 일반 쓰레기로 배출해야 한다는 사실을 환경부 수거 지침 개정을 통해 명확히 안내하고, 위반 시 과태료 부과 등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대안 모색은 이미 시작됐다. 환경부는 2024년 12월부터 서울 강남 3구에서 발포 폴리프로필렌(EPP) 소재 상자를 대여·회수·세척하는 다회용 택배상자 시범사업을 추진 중으로 포장 폐기물을 줄이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컨테이너풀의 폴리프로필렌(PP) 기반 다회용 컨테이너처럼 물류 순환 시스템으로 확대 적용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
기업 차원에서는 수용성 점착제 개발, 재질 투명 공개 의무화, 제지업계와의 협력을 통한 스티키스(Stickies) 저감 기술 개발이 병행돼야 한다.
아울러 환경부의 수거 지침 개정, 기업의 순환경제 전환 투자, 소비자 교육 캠페인 등이 유기적으로 맞물려야만 한다. 이를 통해 종이테이프 사태로 드러난 구조적 비효율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소비자는 “종이라면 무조건 친환경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유통업체의 친환경 마케팅이 실제 환경 개선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꼼꼼히 따져보는 비판적 소비 의식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